카이두 (카묵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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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두는 『몽골비사』, 『원사』, 『자미 알-타와리흐』 등에 언급되는 인물로, 1025년경 메넨 두툼의 아들 카치 쿨루그의 미망인과 모놀룬 여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1050년대 요나라의 거란족이 자라이르를 공격했을 때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었지만 삼촌 나친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자라이르를 정복하고 신하로 삼았다. 몽골 부족을 부흥시켰으며,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르면 자라이르 울루스의 멸망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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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두 (카묵 몽골) | |
---|---|
기본 정보 | |
이름 | 카이두 칸 |
로마자 표기 | Khaidu |
칸 칭호 | 칸 |
씨족 | 몽골 보르지긴 씨족 |
통치 기간 | ? – 1100년 |
이전 통치자 | 하치 홀로그 |
다음 통치자 | 바신코르 칸 |
출생 | 기원후 1025년경 |
출생지 | 몽골 북부 |
사망 | 기원후 1100년경 (74~75세) |
사망지 | 몽골 북부 |
자녀 | 바신코르 독신 차라카이 링쿰 |
시대 | 11세기 |
아버지 | 하치 홀로그 |
어머니 | 모놀룬 |
종교 | 텡그리 신앙 |
왕가 | 보르지긴 왕조 |
기타 정보 | |
음성 표기 (IPA) | IPA-en: /ˈkaɪdu/ IPA-mn: /ˈqʰaɪd̥ʊ/ IPA-mn: /ˈχæːtʊ̽/ |
2. 생애
카이두는 『몽골비사』, 『원사』, 『자미 알-타와리흐』에 언급된 인물이다. 1025년경 메넨 두툼의 아들 카치 쿨루그의 미망인이자 모놀룬(노물룬) 여왕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2] 당시 몽골 북부 지역은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몽골에는 몽골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07-1125)가 있었다.
1050년대 요나라의 거란족은 몽골 동부 케룰렌강을 따라 살던 달리그인 몽골 부족인 자라이르를 공격했다. 자라이르는 카이두의 어머니 모놀룬이 이끄는 보르지긴 몽골족으로 도망쳤으나, 카이두를 제외한 모놀룬과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카이두는 삼촌 나친에 의해 숨겨졌고, 이후 자라이르를 정복하여 신하로 삼았다.
라시드 알-딘의 『자미 알-타와리흐』에 따르면, 케룰렌강은 거란족 지역과 가까워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거란족 군대가 자라이르족을 약탈하러 오자, 자라이르족은 강을 믿고 조롱했지만, 거란군은 댐을 건설하여 강을 건너 자라이르족을 공격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70개 천막 그룹의 자라이르족은 서쪽으로 도망쳐 모놀룬에게 의지했으나, 굶주림에 목초지를 파헤치자 모놀룬은 분노했다. 이에 자라이르족은 모놀룬과 아들들을 죽였다. 카이두는 콴바구드 부족의 사위였고, 나친은 카이두를 숨겨 보호했다. 이후 주변 부족들이 자라이르족을 공격했고, 카이두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집사》에 따르면 카이두가 태어날 무렵, 켈렌 강 유역에는 70클리엔(7만 부민)을 보유한 강대한 자라이르 울루스가 있었다. 히타이(거란) 군세가 자라이르 울루스를 공격하자 자라이르인은 얕보며 도발했고, 히타이인은 뗏목을 만들어 켈렌 강을 건너 자라이르인을 몰살했다. 히타이 병사에게서 도망친 자라이르 부는 모나룬에게 의지했지만, 목초지를 훼손하자 모나룬은 격분하여 자라이르인을 공격했다. 분노한 자라이르인은 모나룬과 아이들을 죽여 몽골 부를 궤멸시켰다.
《집사》에서는 카이두와 나친은 사위로 들어간 부족에 머물렀고, 나친이 카이두를 숨겨 보호했으며, 성장한 카이두는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하여 몽골 부족을 부흥시켰다고 한다. 《원사》에서는 카이두는 모나룬 곁에 있었으나 유모가 숨겨 살아남았고, 나친이 카이두를 데리고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 카이두가 성장하자 군주(칸)로 받들어 몽골 부를 부흥시켰다고 한다.
몽골 부의 우두머리가 된 카이두는 자라이르 부 잔당에게 보복하여 복속시켰다. 《집사》 "자라이르 부족지"에는 자라이르 부족민이 몽골 보르지긴 씨의 세습 가인(오테그 보골)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자라이르 울루스의 공격으로 몽골 울루스는 궤멸 직전이었으나, 나친의 도움으로 자라이르 울루스를 병합하여 더욱 강대해졌다.
2. 1. 자라이르 부족과의 갈등
카이두는 『몽골비사』, 『원사』, 『자미 알-타와리흐』에 언급되는 인물이다.[2] 1050년대 요나라의 거란족은 케룰렌강을 따라 살던 자라이르를 공격했다. 자라이르는 카이두의 어머니 모놀룬(비사에는 노물룬)이 이끄는 몽골족으로 도망쳤으나, 카이두를 제외한 모놀룬과 그녀의 모든 아들이 살해당했다. 카이두는 삼촌 나친에 의해 숨겨졌고, 훗날 자라이르를 정복하여 신하로 삼았다.[2]《집사》 "두툼 마난기"에 따르면, 카이두가 태어났을 무렵 켈렌 강 유역에는 70클리엔(7만 부민)을 보유한 강대한 자라이르 울루스가 몽골 울루스를 비롯한 주변 세력과 다투고 있었다.[3] 히타이(거란) 군대가 자라이르 울루스를 공격했을 때, 자라이르인은 켈렌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얕보며 도발했지만, 히타이인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 자라이르인을 몰살시켰다.[3]
히타이 병사에게서 도망친 자라이르 부는 모나룬이 다스리는 몽골 부 근처까지 이르렀다. 자라이르인은 식용 식물 뿌리를 파먹어 몽골 부의 목초지를 훼손했다. 모나룬은 이에 격분하여 자라이르인을 공격했고, 분노한 자라이르인은 모나룬과 그 아들들을 죽여 몽골 부를 궤멸시켰다.[4]
모나룬의 가족 중 메넨 투둔의 막내 동생이자 바르구트 부[5]에 사위로 들어간 나친과, 메넨 투둔의 아들 카이두만이 살아남았다. 《집사》에서는 나친이 카이두를 숨겨 보호했고, 성장한 카이두는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키워 몽골 부족을 부흥시켰다고 한다.[6] 《원사》에서는 카이두는 유모 덕에 살아남았고, 나친은 자라이르인에게서 빼앗은 말과 매를 되찾아 카이두와 함께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 카이두를 칸으로 받들어 몽골 부를 부흥시켰다고 한다.[7]
몽골 부의 우두머리가 된 카이두는 자라이르 부 잔당에게 보복하여 복속시켰다. 《집사》 "자라이르 부족지"에는 자라이르인들이 몽골 보르지긴 씨의 세습 가인(오테그 보골)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처럼 자라이르 울루스의 공격으로 몽골 울루스는 궤멸될 뻔했으나, 카이두와 나친에 의해 오히려 자라이르 울루스를 병합하여 더욱 강대해졌다.
2. 2. 몽골 부족의 부흥
카이두는 『몽골비사』, 『원사』, 『자미 알-타와리흐』에 언급된 인물이다. 1025년경 메넨 두툼의 아들 카치 쿨루그의 미망인이자 모놀룬(노물룬) 여왕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2] 당시 몽골 북부 지역은 통제하기 어려웠지만, 몽골에는 몽골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07-1125)가 있었다.1050년대 요나라의 거란족은 몽골 동부 케룰렌강을 따라 살던 달리그인 몽골 부족인 자라이르를 공격했다. 자라이르는 카이두의 어머니 모놀룬이 이끄는 보르지긴 몽골족으로 도망쳤으나, 카이두를 제외한 모놀룬과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카이두는 삼촌 나친에 의해 숨겨졌고, 이후 자라이르를 정복하여 신하로 삼았다.[3][4]
라시드 알-딘의 『자미 알-타와리흐』에 따르면, 케룰렌강은 거란족 지역과 가까워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거란족 군대가 자라이르족을 약탈하러 오자, 자라이르족은 강을 믿고 조롱했지만, 거란군은 댐을 건설하여 강을 건너 자라이르족을 공격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70개 천막 그룹의 자라이르족은 서쪽으로 도망쳐 모놀룬에게 의지했으나, 굶주림에 목초지를 파헤치자 모놀룬은 분노했다. 이에 자라이르족은 모놀룬과 아들들을 죽였다. 카이두는 콴바구드 부족의 사위였고, 나친은 카이두를 숨겨 보호했다. 이후 주변 부족들이 자라이르족을 공격했고, 카이두는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6]
《집사》에 따르면 카이두가 태어날 무렵, 켈렌 강 유역에는 70클리엔=7만 부민을 보유한 강대한 자라이르 울루스가 있었다. 히타이(거란) 군세가 자라이르 울루스를 공격하자 자라이르인은 얕보며 도발했고, 히타이인은 뗏목을 만들어 켈렌 강을 건너 자라이르인을 몰살했다.[3] 히타이 병사에게서 도망친 자라이르 부는 모나룬에게 의지했지만, 목초지를 훼손하자 모나룬은 격분하여 자라이르인을 공격했다. 분노한 자라이르인은 모나룬과 아이들을 죽여 몽골 부를 궤멸시켰다.[4]
《집사》에서는 카이두와 나친은 사위로 들어간 부족에 머물렀고, 나친이 카이두를 숨겨 보호했으며, 성장한 카이두는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하여 몽골 부족을 부흥시켰다고 한다.[6] 《원사》에서는 카이두는 모나룬 곁에 있었으나 유모가 숨겨 살아남았고, 나친이 카이두를 데리고 바르구진 투쿰으로 이주, 카이두가 성장하자 군주(칸)로 받들어 몽골 부를 부흥시켰다고 한다.[7]
몽골 부의 우두머리가 된 카이두는 자라이르 부 잔당에게 보복하여 복속시켰다. 《집사》 "자라이르 부족지"에는 자라이르 부족민이 몽골 보르지긴 씨의 세습 가인(오테그 보골)이 되었다고 설명한다.[8] 이처럼 자라이르 울루스의 공격으로 몽골 울루스는 궤멸 직전이었으나, 나친의 도움으로 자라이르 울루스를 병합하여 더욱 강대해졌다.
3. 요사(遼史)의 기록
1014년(개태 3년) 적렬부의 이랄(이라)이라는 인물이 추장 소와(샤와)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고, 인근 부족도 이에 호응하여 요나라의 거모고(쿰크) 성을 함락시켰다.[9] 야율세량이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고, 1015년 여름에는 먼저 적렬부에 호응한 저복부(케레이트부)・오고부(타타르부)를 격파하고, 적렬부마저 일단 복속시켰다. 그러나 요나라 조정에서는 적렬부의 반란 재발을 막기 위해 내지로 이주시키는 계획이 제기되었고, 야율세량이 이 계획을 실행할 틈을 타서 적렬부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재차 일어난 반란에 징벌을 가한 야율세량은 적렬부를 다시 격파하고 그 성년 남자(정장)를 모두 죽였다. 그 후에도 요나라 군의 틈을 노린 적렬부의 역습이 있었고, 장수 중 한 명인 발괄을 놓치는 실책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적렬부 사람들을 케레이트 강을 따라 이주시켜 그곳에 살게 했다.[10]
이처럼 『요사』에 묘사된 적렬부의 멸망은 시대·장소 모두 자라이르 울루스의 멸망과 매우 흡사하며,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에서 요나라 군의 공격을 피한 적렬부인=자라이르인이 몽골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면, 카이두 칸이 활약한 것은 11세기 전반의 일로 보인다.[11]
4. 계보
5. 평가
참조
[1]
서적
The language of the Chines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http://worldcat.org/[...]
Published for the Society by B. Blackwell
1974
[2]
웹사이트
Kingdoms of Central Asia - The Mongols
https://www.historyf[...]
2022-06-13
[3]
문서
志茂2013,512頁。なお、この箇所は『元史』の記述は簡素で『集史』の方が詳しく記述されている。
[4]
문서
『元史』巻1太祖本紀,「孛端義児歿、子八林昔黒剌禿合必畜嗣、生子曰咩撚篤敦。咩撚篤敦妻曰莫拿倫、生七子而寡。莫拿倫性剛急。時押剌伊而部有群小児掘田間草根以為食、莫拿倫乗車出、適見之、怒曰『此田乃我子馳馬之所、群児輒敢壊之邪』。駆車径出、輾傷諸児、有至死者。押剌伊而忿怨、尽駆莫拿倫馬群以去。莫拿倫諸子聞之、不及被甲、往追之。莫拿倫私憂曰『吾児不甲以往、恐不能勝敵』。令子婦載甲赴之、已無及矣。既而果為所敗、六子皆死。押剌伊而乗勝殺莫拿倫、滅其家」。なお、この箇所は『集史』の記述は簡素で『元史』の方が詳しく記述されている。
[5]
문서
『集史』ではナチンが婿入りしていたのは「カンブト(カンバウト)部族」とされるが、この部族は他に全く出てこない名称で、実在したかどうか疑わしい(岡田1993,152頁)
[6]
문서
志茂2013,513頁
[7]
문서
『元史』巻1太祖本紀,「唯一長孫海都尚幼、乳母匿諸積木中、得免。先是莫拿倫第七子納真、於八剌忽民家為贅婿、故不及難。聞其家被禍、来視之、見病嫗十数与海都尚在、其計無所出、幸駆馬時、兄之黄馬三次掣套竿逸帰、納真至是得乗之。乃偽為牧馬者、詣押剌伊而。路逢父子二騎先後行、臂鷹而猟。納真識其鷹、曰『此吾兄所擎者也』。趨前詒其少者曰『有赤馬引群馬而東、汝見之乎』。曰『否』。少者乃問曰『爾所経過有鳧雁乎』。曰『有』。曰『汝可為吾前導乎』。曰『可』。遂同行。転一河隈、度後騎相去稍遠、刺殺之。縶馬与鷹、趨迎後騎、詒之如初。後騎問曰『前射鳧雁者、吾子也、何為久臥不起耶』。納真以鼻衄対。騎者方怒、納真乗隙刺殺之。復前行、至一山下、有馬数百、牧者唯童子数人、方撃髀石為戯。納真熟視之、亦兄家物也。詒問童子、亦如之。於是登山四顧、悄無来人、尽殺童子、駆馬臂鷹而還、取海都並病嫗、帰八剌忽之地止焉。海都稍長、納真率八剌忽怯谷諸民、共立為君。海都既立、以兵攻押剌伊而、臣属之、形勢浸大、列営帳於八剌合黒河上、跨河為梁、以便往来。由是四傍部族帰之者漸衆。海都歿、子拜姓忽児嗣。拜姓忽児歿、子敦必乃嗣。敦必乃歿、子葛不律寒嗣」
[8]
문서
志茂2013,511-515頁
[9]
문서
『遼史』巻94列伝24,「耶律世良、小字斡、六院部人。[開泰]三年、命選馬駝於烏古部。会敵烈部人夷剌殺其酋長稍瓦而叛、隣部皆応、攻陥巨母古城。世良率兵圧境、遣人招之、降数部、各復故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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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史』巻15聖宗本紀6,「[開泰三年]九月丁酉、八部敵烈殺其詳穏稍瓦、皆叛、詔南府宰相耶律吾剌葛招撫之。辛亥、釈敵烈数人、令招諭其衆。壬子、耶律世良遣使献敵烈俘。……[開泰四年夏四月]丙寅、耶律世良等上破阻卜俘獲数……壬申、耶律世良討烏古、破之。甲戌、遣使賞有功将校。世良討迪烈得至清泥堝。時於厥既平、朝廷議内徙其衆、於厥安土重遷、遂叛。世良懲創、既破迪烈得、輒殲其丁壮。勒兵渡曷剌河、進撃余党、斥候不謹、其将勃括聚兵稠林中、撃遼軍不備。遼軍小卻、結陣河曲。勃括是夜来襲。翌日、遼後軍至、勃括誘於厥之衆皆遁、世良追之、軍至険厄。勃括方阻険少休、遼軍偵知其所、世良不亟掩之、勃括軽騎遁去。獲其輜重及所誘於厥之衆、並遷迪烈得所獲轄麦里部民、城臚朐河上以居之」
[11]
문서
岡田1993,150-15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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